진영 논리에 매몰된 한국 민주주의
반대편 마음 설득하는 절차 사라져
고물가, 금리인상 등 나쁜 변수 수두룩
실익 없는 싸움만 펼치는 정치권의 덫
새 대통령, 국민 목소리에 귀 기울일까

불통의 시대,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목소리가 중요해졌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불통의 시대,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목소리가 중요해졌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 험로와 명분 

민주주의는 거친 길이다. ‘자유의사’ ‘다수결’이란 민주주의의 꽃만 보면 예쁜 길이 펼쳐져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는 반대 혹은 갈등과의 싸움이다. 반대편의 말을 경청하고, 반대편의 마음을 설득하는 게 민주주의의 순리順理란 거다. 혹여 반대편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하더라도 실패한 게임이 아니다. 그 수고스럽고 까다로운 절차 속에서 ‘명분’이란 싹이 터서다. 

애덤 쉐보르스키 미국 뉴욕대(정치학)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 민주주의에서 (반대자와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다양한 갈등이 있어야 대중의 각기 다른 요구 사항을 대변하는 다양한 정당이 만들어진다. 이 정당들이 조정과 타협을 통해 갈등을 줄이는 게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래, 민주주의는 비효율적이지만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 반대편의 실종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지금 어떨까. 세계적인 석학이자 프랑스의 문명비평가인 기 소르망(Guy Sorman)은 한국 정치의 현주소를 아프게 꼬집었다. “… 한국은 복수復讐에 함몰된 정치로 내전 상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벌어지는 복수의 정치를 버려야 사회 갈등이 줄고 민주주의가 완성된다…(동아일보 ‘2020년대 이후, 세계의 미래 인터뷰’ 중).” 

5월 10일 0시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지하에 마련된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임기를 시작한 윤석열 대통령. [사진=뉴시스]
5월 10일 0시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지하에 마련된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임기를 시작한 윤석열 대통령. [사진=뉴시스]

몇몇은 ‘해외 학자가 우리나라 사정을 뭘 알겠느냐’고 받아칠지 모르지만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 기 소르망의 날선 비판이 한국 정치의 고질병을 매섭게 관통하고 있어서다. 

언젠가부터 한국 민주주의에선 반대편이 보이지 않는다. 정치를 한다는 자들은 한쪽 진영에 서서 내편 말만 듣고, 내편 마음만 움직이며, 내편 행동만 통제한다. 애써 묵인默認하려 해도 과하고 오만하다. 하긴 뉴욕타임스까지 ‘내로남불(naeronambul)’이란 풍자를 인용했으니, 말 다 하지 않았는가. 

# 붕괴, 참담한 진단 

반대편을 삭제한 효과는 외줄 타듯 아슬아슬하다. 여야 정치권이 일을 추진하는 속도는 몰라보게 빨라졌지만, 그 과정에서 명분과 지지를 얻는 덴 실패했다. 단 한번의 발표로 소통 절차를 끝낸 ‘대통령 집무실 이전건’은 국민 절반의 지지조차 구하지 못했다.

70년 사법체계를 뿌리째 흔드는 ‘검수완박’은 18일 만에(발의~공포) 해치웠지만 국민 60%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비효율적이지만 효율적인 민주주의의 근간이 속절없이 무너졌다’는 참담한 진단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국민이 통제하지 않으면 어떤 정부도 계속 좋은 일을 할 수 없다.” 
-토머스 제퍼슨미국 제3대 대통령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수준 낮은 인간들에게 지배를 당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

# 허상과 반란

이럴 때일수록 중요한 건 국민의 목소리다. 이는 상투적인 당위론이나 명분론이 아니다. 민간 부문에선 이미 ‘목소리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스마트폰 성능을 제한하는 앱 GOS로 논란을 일으킨 삼성전자 CEO가 소액주주 한명의 지적에 고개를 숙인 건 상징적인 사례다.

이른바 검수완박 법안은 단 18일 만에 국회를 통과했다. [사진=뉴시스]
이른바 검수완박 법안은 단 18일 만에 국회를 통과했다. [사진=뉴시스]

KT가 ‘재판 중인 CEO를 믿지 못하겠다’는 소액주주의 뜻을 반영해 해당 CEO를 사실상 ‘(주총 전) 불신임’한 것도 주목할 만한 예다. 예년 같으면 허상虛想에 불과했던 ‘목소리의 반란’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 속 얘기가 됐다는 거다. 

이렇게 개인의 목소리가 커진 덴 나름의 이유가 있다. ‘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의 출현이다. SNS·유튜브·익명 커뮤니티의 활성화는 파편처럼 쪼개진 목소리를 언제든 모을 수 있는 무대를 제공했다. 특히 ‘제 목소리를 내는 게 일상’인 MZ세대는 이 무대 위를 거침없이 활보하고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토론과 논쟁을 즐기며 자라난 이들이 전사戰士 혹은 공격자처럼 권력자를 감시하고 있다는 거다. 

「K를 생각한다」 의 저자 임명묵 작가는 이 현상을 두고 “전통적인 권력관계가 역전됐다”고 평가했다. 위정현 중앙대(경영학) 교수도 같은 결의 주장을 폈다. “객체에 불과했던 국민(또는 고객과 소비자)이 권력의 바깥에 머무는 제3의 존재가 아닌 ‘바운더리(Bo undary) 내부’의 존재가 됐다.” 권력의 주변부에서 맴돌던 국민이 이젠 명실상부한 ‘인싸’가 됐다는 얘기다.  

# 실익 없는 부메랑 

5월 10일 새 정부가 출범했다. 출발선에 서기까지 여야 정치권의 조정과 타협, 경청과 존중 따윈 없었다. 새 대통령을 따르는 무리와 그를 반대하는 무리는 벌써 ‘진영’을 벌려놓은 채 실익 없는 부메랑만 날리고 있다. 

고물가와 경기침체가 동시에 덮치는 스태그플레이션 리스크, 러시아발 에너지 전쟁의 위협, 우크라이나발 식량 위기,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금리인상 빅스텝 기조, 끝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침공까지….

세계 경제는 지독한 늪에 빠져 있고 우리 민생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데, 여야 정치권은 염치없이 ‘내편의 안위’만 생각한다. 웃지 못할 모순이 판치는 내로남불의 시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걸 뭘까. 

이윤찬 더스쿠프 기자
chan4877@thescoop.co.kr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이혁기 더스쿠프 기자
lhk@thescoop.co.kr

윤정희 더스쿠프 기자
heartbring@thescoop.co.kr
 
최아름 더스쿠프 기자
eggpuma@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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